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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람', 홍은전, 봄날의책, 2020 본문

오르골

'그냥, 사람', 홍은전, 봄날의책, 2020

나풀  2023. 8. 1. 23:54

5/71

도서관에서 특강을 하던 그가 유럽에서 공부했다면 나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부했다. 그것은 평생을 방구석과 집안과 시설에 갇혀서 여전히 조선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21세기의 한국 사회를 배웠다는 뜻이다. 그것은 21세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21세기를 전혀 다르게 겪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그것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전의 나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에 우물 밖 세상에 대해 배워야만 세상에 대해 아주 작은 소리로라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만난 우물 밖 사람 역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힌 듯 보였고,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의 세계를 몰랐으니 그도 나의 세계를 모르는 게 공평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세상은 그런 우물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더 거대하고 더 유구한 우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우물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날 나는 나의 우물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계관이란 나의 우물이 어디쯤에 있고 다른 이들의 우물과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

노들에서 매일 들으며 살았던 소리들,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론 도망치고 싶게 했던 사람들의 한숨이나 신음, 비명이나 절규 같은 소리는 노들을 그만두자마자 마치 방음설비가 완벽하게 갖춰진 방의 문을 꾸욱 닫고 나왔을 때처럼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20/71

사람들은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 나는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 상처 난 곳으로 온갖 악한 것들이 꿀처럼 스며드는 법이다. 약자가 없어야 강자가 없다.

 

34/71

노동절 집회 도중 체포된 남편에게 구속 영장이 신청된 날이었다. 너무 무서웠는데 무섭다는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남편이 구속될 위기에 처한 아내에게 형사가 보인 멸시와 푸대접이 비현실적일 만큼 적나라해서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들은 남편을 가두거나 가두지 않을 권력을 쥐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납작 엎드리는 일뿐이라는 걸. 불타는 분노는 우리를 도우러 온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몫이었다. 처음으로 '비참'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오랜 시간 절박한 이들과 함께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연대하는 사람이었을 뿐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걸, 둘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손 벌리는 자'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

 

35/71

박경석 대표가 버스를 타고 대구로 가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터미널까지 오는 데 17년이 걸렸는데, 대구까지 가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까요.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라는 말을 하는 데 그의 인생 전체가 필요했습니다. '고작, 버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가 싸워온 건 평생 자신을 옥죄던 굴레였고, 그 싸움이 그를 살게 했으므로, 저는 이 문장이 어쩐지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누군가의 평생이 있어야만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상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운 위로입니다. 선처를 바랍니다.

 

44/71

"한국에선 딸이 살기 힘들 것 같아요. 결혼을 하려고 해도 시댁에서 싫어하겠죠. 자기 아들이 번 돈을 처가에 줘야 할까봐 걱정하지 않을까요?"

아, 이것은 얼마나 한국적인 고통인가. 인숙은 이제 딸을 지키기 위해 바다만큼의 거리를 각오하고 있었다. 딸의 인생에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딸이 스무 살이 되자 인숙이 받던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가 절반으로 줄었고, 딸이 알바를 해서 돈을 버니 인숙의 기초생활수급비가 삭감되었다. 인숙의 가난과 장애에 대한 부양 책임을 딸에게 넘기려는 정부의 지침이었다. 인숙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딸은 딸의 인생을 살게 해줘야 하잖아요."

 

50/71

사진작가 최민식이 찍은 어떤 사진을 보고 숨이 딱 멈추어진 적이 있다. "부산, 1965"라고 적힌 사진 속에선 한 소년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조심스럽게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뒤통수엔 커다란 땜통이 있었고 윗도리를 입지 않아 드러난 왜소한 등허리엔 날갯죽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공손히 손을 모으기 위해 소년의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그토록 노골적인 구걸도, 그토록 적나라한 시선도 적이 충격적이었지만 내 시선을 더 오래 붙든 것은 사진 옆에 쓰인 작가의 말이었다.

"나는 자신의 운명과 대결하며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 고독한 사람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구걸하는 소년에게서 '굴복'이 아니라 '대결'을 읽어내는 일, 그것은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최민식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재난 위에 태어난 가난한 소년이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치열한 현장에 몇 푼의 동전을 던지는 일은 온당치 않다 여겼던 것 같다. 그는 소년의 준엄한 대결을 사진으로 기록했고, 그것이 그가 자기 시대와 대결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Note: 글을 읽고 사진을 찾아보았는데, 그렇다 인상적인 사진이었다. 다만 한 가지 저자의 글에서 고개를 갸웃했던 부분은 몇 푼의 동전을 던져서라도 그의 대결을 응원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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