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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난이 온다. 김만권, 2021, 혜다 본문

오르골

새로운 가난이 온다. 김만권, 2021, 혜다

나풀  2023. 8. 7. 01:17

재미있게 읽었고, 곱씹어보고 싶은 부분도 많았다. 현대기술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가 어디에서 유래하고 진짜 문제는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어떤 방향이 되어야 할지, 큰 흐름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어서 배우는 바가 많았다.

 

 

14%

택시 없는 택시 회사, 기사를 쓰지 않는 미딩 회사, 단 한 칸의 방도 없는 숙박 회사, 이게 플랫폼 시대에 변화한 자본의 모습이죠.

 

14%

그런 경험을 가진 우리가, 낡은 기계의 옆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새로운 기계 시대를 거부한다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 아닐까요? 오히려 새로운 기술과 파트너십을 만들고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요?

 

15%

첫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냈다는 기술은 현재 얼마나 발전한 것일까? 그 기술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얼마나 바꾸어 놓을까? 새로운 기계는 인간에게 닥친 새로운 고난일까 아니면 또 다른 기회일까? 인간과 새로운 기계는 서로 의존하는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 파트너십을 만들어 가야 할까?

 

둘째, 기술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공유 플랫폼이란 어떤 것일까? 공유 플랫폼은 새로운 공동 소유의 방식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식의 착취에 불과한 걸까?

 

셋째, 21세기 자본주의는 왜 극소수의 승자와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라 비난받고 있을까? 그렇다면 다수가 통치하는 민주주의는 왜 자본주의의 이런 병폐를 방치하고 있는 걸까? 민주주의는 새롭게 변모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통제할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

 

넷째, 승자와 엘리트의 독식 사회에서 노동은 그에 합당한 존중을 받고 있을까? 더하여 왜 빈곤은 과거보다 더 심한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일까? 불평등은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혐오와 모멸의 세계를 짓고 있는 걸까? 빈곤, 혐오, 모멸의 시대에 인간이 존엄하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마지막으로, 21세기 새로운 기술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평등이란 해결 가능한 문제일까? 만약 해결하고자 한다면 어떤 시도가 가능할까? 그런 시도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21%

인간의 현실에서 "인과의 '만일 ~라면 ~이다'는 시간을 포함하고 있지만, 논리학의 '만일 ~라면 ~이다'는 초시간적이다. 이 점에서 논리학은 인과에 대한 불완전한 모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2017), 347-348쪽) 결국 시간 속에서 튀어나오는 우연성이라는 '예외'가 개입하게 되면 인공지능은 작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의미예요.

*note: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시간이 포함되지 않나? 짜 넣으려면 짜 넣을 수 있는 것 같은데. '우연성'의 의미라면 확률론적 알고리즘은 우연을 도입하고 있고. 

 

26%

"기술의 발전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있는 시대에, 왜 우리는 일자리라는 생존 수단을 고민해야만 할까?" 다시 말해 "인류가 탄생한 이래 가장 파이가 커진 시대에, 나눌 것이 가장 많은 시대에, 왜 우리는 내 몫의 파이를 어떻게 지켜 내야 할지 걱정하는 것일까?"

제 생각엔 우리가 고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생산력 증대가 필요했던 결핍의 시대의 분배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산업혁명을 진전시키는 데 큰 장애물이 하나 있었어요. 사람들이 결핍에 시달리면서도 필요 이상의 일은 하지 않으려 들었던 거예요. 기계 앞에서 열심히 일할 노동자들이 필요했지만 사람들은 여간해서 과도하게 일하려 들지 않았죠. 그러자 노동력이 필요했던 이들은 과거에는 전혀 윤리적 문제가 아니었던 '노동'을 선악의 문제로 바꾸는 시도를 해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선이요, 게으른 것은 악'이라는 노동 윤리를 만들어 낸 것이죠. 종래에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설명하듯, 열심히 일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며, 나아가 열심히 일해서 부를 얼마나 쌓느냐가 신이 당신을 구원할 것인지 알 수 있는 증거라고까지 설파하게 되었던 거예요.

 

28%

지배와 종속이라는 관계를 벗어던질 수만 있다면 기계와 파트너십을 맺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자연은 인간의 지배대상으로만 보는 것, 우리가 만든 기계는 단순히 우리의 말을 그대로 이행해야만 하는 종속된 객체여야 한다는 발상,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 파트너십이라고 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건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이에요. 이런 점에서 기계는 인간보다 더 믿을 만한 상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30%

하지만 4차 산업혁명에 들어서며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제1 기계 시대가 만들어 놓은 세 가지 해법(*note: 안정적 일자리와 임금, 노동 3권, 국가 사회보험) 모두가 그 유효성을 잃고 있는 현실이에요. 제1 기계 시대의 해법이 만들어 놓은 보호망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소수의 인간만이 특권의 형식으로 누리고 있을 뿐이죠. 제2 기계 시대의 인간들은 '각자를 위한 노동'으로 내몰리며 '서로를 위한 보호'라는 체계를 상실하고 있어요.

 

38%

노동자 계급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복지 정책과 민주주의 차원에서 중심축을 이루던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 역시 쇠퇴를 겪었어요. 경제적인 역할의 축소가 정치적인 역할의 약화로 이어졌던 거예요.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조적 변동으로 인해 국가와 자본이 '복지'라는 대의 아래 협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가 사라져 버렸단 점이에요. (...)

그러나 지구화의 확산 아래 운영되는 포스트산업사회에선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국가의 경계 '밖'에 값싼 노동력이 '늘'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자본이 값싼 노동력을 국가 밖, 즉 해외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국내 노동자들을 보호할 필요가 사라져 버린 거죠. 이제 복지국가에서 보호하고자 했던 산업시대의 주요 노동력들은 소비시대의 자본에겐 더이상 필수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자원으로 전락해 버렸어요.

 

38%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묻고 있는 질문으로 바꾸자면, 어떻게 제1 기계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렵게 구축해 놓은 '서로를 위한 보호'라는 체계를 약화시키는 데 스스로 동의했던 걸까요?

(...) 하지만 여러분과 함께 주목해 보고자 하는 설명은 '복지국가의 수혜를 받고 자라난 세대, 특히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다수 중산층의 자신감'이 그 주요한 요인이라는 바우만의 분석이에요.

(...) 그 이유는 우리들 대다수가 자신이 이룬 성공을 오로지 자기 노력만으로 얻었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앞선 차별철폐조치의 사례처럼 말이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결국 자신의 성공을 만들어 준 사다리를 다음 세대들이 쓸 수 없게 걷어차 버리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난 거예요. 바우만은 이처럼 복지국가가 만들어 낸, 자신감에 넘치는 세대가 복지의 힘을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국가의 도움 없이도, 시장을 통해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 일어났다고 분석하죠. 이런 바우만의 분석은 복지국가의 수혜자들이 스스로 복지의 축소에 동의하게 된 주요 원인을 잘 설명하고 있어요.

*note: 글쎄.. 한국의 경우 저런 여유가 있었나? 한국은 IMF를 거치면서 국가보호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으니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은데. 닭과 달걀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위 분석은 강한 복지를 여전히 고수하는 북유럽 국가들에도 통용되나? 

 

42%

'자기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다.'는 윤리에 담긴 핵심적 발상을 한마디로 정리해볼까요? '삶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에 요구하기보다는 스스로 그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 결국 국가가 보호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거죠. (...) 특히 이 윤리와 함께 성장한 세대, 유럽에서는 Y세대, 미국에서는 밀레니엄 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대공황 이후 그 어느 세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국가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역사적으로는 거의 없었던 기이한 일이 일어났던 거예요.

*note: 책에는 별 언급이 없긴 하지만, 그래서 요즘 세대들은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희박해진 것 같다. 받은 게 없기 때문에 나도 줄 이유 없다는 생각. 이민에 대해서도 훨씬 개방적이 된 것 같고. 코로나때 국가와 국경의 힘을 느끼긴 했지만 일시적 현상이었을 수 있다.

 

46%

한 마디로 자본이 더 이상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이건 결국 자본이 노동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생산수단의 소유 권리를 너에게 주마. 그러니 이제 관련 비용도 스스로 부담해라!' 생산수단의 이전이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거죠.

(...) 공유 경제의 플랫폼에서 실제로 공유되고 있는 건 '건당', '분당', '시간당'처럼 짧은 시간만 사용할 노동력이 필요한 이들과 '별점의 감시 아래 경쟁하며 상시 대기하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수요와 공급의 만남뿐이에요. 간단히 말해 보호가 필요한 곳에선 독립 사업자로, 작업이 필요한 곳에선 노동자로 남게 되는 거죠.

(...) 오히려 감시는 사용자가 비용을 들여 노동자에게 행하던 권력이었죠. 그런데 공유 플랫폼은 이 감시 비용마저 소비자들에게 떠넘겨요. 소비자들의 반응을 통해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감시 비용을 소비자들에게 떠넘기는 거죠. 정말 놀랍고 창의적이지 않나요?

 

47%

'공유 경제'라는 기치를 내건 플랫폼 자본은 '자유로운 부업, 유휴 자산, 독립 사업자, 더 많은 소득'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기사들일까, 아니면 별점의 감시 아래 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아가는 대기 노동자들과 아무런 보호 없이 질병과 빈곤에 시달리는 그들의 삶을 상징하는 기사들일까?'

요약하자면, 세계 시장에서 글로벌 시장으로의 거대한 전환, 복지가 길러 낸 자신감 넘치는 세대들이 역설적으로 복지국가 대신 시장 체제를 선택한 것, 내 삶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책임 윤리의 확산, 스마트폰 인류의 등장과 함께 성장한 플랫폼 자본주의 그리고 플랫폼 자본으로의 변신이 양산해 낸 불안정한 비임금 노동자 등 연쇄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요인들이 제1 기계 시대가 만들어 낸 '서로를 위한 보호 체계'를 무너뜨린 원인이 되었던 거예요.

 

49%

세부적으로 볼 때 국가 간의 불평등이 심해지고 대다수의 국가에서 불평등이 심화되었음에도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중국과 인도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 거대한 인구를 가진 두 국가의 성장 때문에 이 두 국가 밖의 사람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왜곡된 통계가 나오고 있다는 거죠.

 

50%

디지털 디바이드: 기술의 혜택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 이 용어는 디지털 기술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세상이 디지털로 바뀌었다면 그 디지털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건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 다시 말해 기술이 빨리 발전하면 할수록 뒤처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거죠. 특히 디지털 기술은 정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디지털 기술을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아는 걸 넘어 정보를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하죠. (...) 디지털 기술이 가진 또 하나의 역설은, 이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이 분야에 필요한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거예요. 

 

51%

터보택스의 사례는 디지털 기술의 특성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첫째, 저비용으로 가치 있는 일을 모두가 동일하게 수행하도록 할 수 있다. 둘째, 이로 인해 사회는 풍요로워지지만 이전에 가치 있는 일을 수행하던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으며, 일자리가 줄어든 만큼 절약된 비용은 소수의 사람이 독점하게 된다. 디지털 기술이 불평등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51%

2019년 국세청은 '2017 귀속연도 통합소득(근로소득과 종합소득) 천분위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어요. (...) 이 자료에 따르면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금융·임대 소득 등을 합친 통합소득 기준으로 상위 0.1%에 속하는 2만 2,000여 명이 하위 27%에 속하는 629만 5,000명의 소득을 모두 합친 것만큼 버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들의 소득을 중간 계층과 비교하면, 상위 0.1%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4억 7,400만 원이었던 반면 중위 소득은 2,301만 원으로, 상위 0.1%가 중위 소득의 64배를 벌었어요.

 

54%

국가는 부유해졌는데 정부는 왜 가난해진 것일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공공 부문의 부가 민간 부문으로 대거 이전되는 현상 때문이에요. 다른 말로는 '민영화'라 부르죠. (...)

지구적 시장은, 시민이라면 누구나 낮은 비용으로 기초적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는 발상 아래 성립된 공공 부문 산업을 공격해 왔어요. '왜 전기, 교통, 의료, 교육, 수도 등과 같은 산업은 이익을 따지지 말아야 하는가? 왜 복지 부문은 상업성을 따지지 말아야 하는가?' 그런데 이런 주장이 먹혀들어 간 거예요.

흥미로운 건, 기업들이 돈이 되지 않는 공공사업 분야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기업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런 사업은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콜린 크라우치의 표현을 빌자면 "오직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거의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이에요. 이윤 추구만이 목적인 민간 기업에서는 쳐다볼 가치도 없는 거였죠.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건, 정부가 돈이 안 되는, '잔여화'된 이런 공공사업을 민간에게 넘기면 원래는 '권리'였던 것이 '벌칙'으로 전락한다는 점이에요. 취업 알선 사업이 대표적이죠. 민간 기업이 알선한 곳에 취직하지 않으면 실업 급여가 박탈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실업 급여가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처벌의 도구로 전락하는 거예요. 공공 사업을 민영화한다는 건 이렇게 민간 기업에 지나친 특권을 부여하게 되는 부분도 있어요.

 

59%

그런데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의 더 중요한 특징은, 정치결정권자들이 부유한 이들의 이익을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실현시켜 준다는 데 있어요. 공공 부문의 민영화가 대표적인 사례죠. 시민의 대표자들이 모인 의회에서, 합법적 절차를 통해, 없던 법을 새로 만들어가며,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거죠. (...)

결론적으로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에서 '제도권 정치인들은, 심지어 진보적 정치인들조차 슈퍼리치들의 이익을 견제하고 그들의 부패를 막는 일에 결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게 크라우치의 주장이에요.

 

60%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제3의 집단을 설정해요. 여기엔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난민, 여성 등이 포함되죠.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국 내 다수인 '우리, 평범한 사람들' 대신 이 '제3의 집단'에 관심을 더 많이 쏟는다고 주장해요. 이들이 '평범한 우리'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을 조장해 지지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쉽게 말해 사회의 최약층인 '더 배제된 자'를 이용해 평범한 이들로 구성된 '덜 배제된자'들을 결집하는 방식이죠. 트럼프와 브렉시트가 바로 이런 우파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에 기댄 대표적 사례예요.

 

62%

샌더스와 코빈이 일으킨 열풍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지구화 과정에서 생겨난 피해의 당사자로서 중산층 청년 세대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했다는 점이 있어요. 이런 정치적 결집은 세부적으로 볼 때 두 가지 커다란 의미가 있어요.

첫째, 지구화를 주도한 두 국가,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결집이라는 점, 바로 지구적 시장의 핵심부에서 일어난 저항이라는 점.

둘째, 이런 저항이, 자신들을 대표할 정치인을 스스로 선택해 대통령과 수상을 만들기 위한 제도권 운동으로 표출되었다는 점.

가장 효과적인 변화는 제도권을 공략할 때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가장 강력한 제도권 공략법은 풀뿌리 운동이 제도권의 변화를 추구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시도였죠. 이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우리가 목격했던 변화의 중요성은 풀뿌리 운동이 제도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이런 풀뿌리 운동이 더욱 반가웠던 이유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이 해체된 후 주권자의 공백이라는 위기에 빠져 있는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주권자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note: 하지만 결국 둘 모두 정권집권에 실패했는데, 글은 그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중산층 청년세대들'의 결집,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결집, '제도권 운동'. 풀뿌리 운동에 의한 제도권의 변화는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회의도 든다.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빈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주권자는 결국 소비자로 귀결되는 것만 같고.

 

66%

간단히 이야기하면 '16세기부터 시작된, 인간이 직면한 새로운 사회적 조건들을 근대성이라 부른다.'고 정리할 수 있어요.

(...)

이처럼 근대는 민족국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노동윤리, 합리성(계몽), 가치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삶의 조건 속에 살아가는 시대를 뜻하는 말이에요. 근대화는 바로 이런 삶의 조건으로 옮겨 가는 것을 뜻하죠.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때는, 바로 이런 조건이 삶 속에 온전히 자리 잡았다는 뜻이죠. 

 

70%

바텔스는 이 연구를 통해 어떤 정책이든 반응성에서 일관적이었던 변수는 딱 하나, 그 집단의 '소득수준'이었다고 말해요. '소득이 높은 이들에겐 반응하고, 소득이 낮은 이들에겐 반응하지 않는다.' 이게 이 연구의 결론이죠.

 

71%

바텔스의 연구가 나온 후 유럽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2013년에 있었어요. "소득 불평등이 정치적 대표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가 이 연구의 핵심이었죠. 정치인들이 '더 가난한 자'와 '더 부유한 자'를 동등하게 대변하고 있는지 조사한 거죠. 유럽에서 치러진 49번의 선거를 연구한 결과, 정치인들이 저소득층보다는 중간 이상의 소득층을 대변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밝혀냈죠.

 

71%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소비력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말이죠.

(...) 불완전 고용의 소비사회에서 '실업'은 단지 직장을 잃는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소비력을 잃고, 결국 사회의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72%

옛날엔 집사나 하인들이 하는 일이라 해서 이 직종을 '하인 경제'라 부르는 이들도 있어요. 직업의 귀천이 없는 시대지만 이 컨시어지 직종에서 제공하는 일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아요. 

 

74%

경제학자이자 국제노동문제 권위자인 가이 스탠딩은 이런 온라인 업무들이 대부분 공장 노동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해요. 극단적인 테일러 시스템에서 볼 수 있는, '단순 작업의 무한정 반복'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75%

플랫폼 노동을 통해 드러나는 제2 기계 시대의 문제는, 사용자도 노동자도 아닌 '모호한 노동'의 형태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예를 하나 살펴볼까요? 혹시 '0시간 고용'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고용계약서에 '사용자는 고용된 자에게 일을 제공할 의무가 없다.'고 쓰는 기이한 방식의 계약이에요. 영국 같은 곳에서는 상당히 일반화된 형태의 계약이죠. 이 계약서에 따르면,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일주일 전까지만 작업 스케줄을 알려주면 돼요. 회사가 알려주기 전까지 노동자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라, 일주일 뒤의 스케줄을 잡을 수가 없는 거죠. 운이 나쁘면 한 주 동안 일을 못할 수도 있는 거예요. (...)

이런 0시간 고용의 또 다른 문제는 '시간당 고용'이에요. (...)

0시간 고용이 갖고 있는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에요. 사용자들은 0시간 고용을 통해 필요한 노동력을 늘 대기상태로 만들어놓아요. 필요할 때 언제든 데려다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심지어 계약서에 다른 곳에선 일할 수 없다는 조항까지 넣기도 하죠.

 

76%

플랫폼 노동자도, 드라마 현장 스태프도 모두 국가가 허용한 제도 아래서 누군가에게 고용된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들이 노동자로서 가진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국가가 제도적으로 허용한 거죠. 즉, 제도적으로 배제된 거라 할 수 있어요. 제도에서 배제된 이들은 국가의 보호망 외부에 놓이게 되겠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국가의 시민으로서 살아가야만 해요. '배제시켜 외부에 포함한다.'는 말, 이제 이해가 가나요? 아감벤은, 국가가 이런 배제를 통해 생명 그 자체를 담보로 구성원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말하죠. 그리고 이렇게 배제되어 외부에 포함된 자들은 헐벗은 인간, 호모 사케르로 전락한다고 주장해요. 만약 우리가 노동할 자격마저 상실한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으로서 또 한 번의 배제를 경험하며 더 먼 외부에 포함되어, 이 땅에 사는 사람이긴 하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겠죠. 

 

77%

'소비사회에서 생산자들의 윤리인 노동 윤리가 필요한 이유는 가난한 자들을 사회에서 배제시키기 위해서다.' (...)

노동윤리란, 명확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라는 이분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덕원칙이에요. 이 윤리에는 가난한 자를 향한 도덕적 비난이 내재해 있죠. 한마디로, 노동 윤리란 가난을 '타락의 언어'로 그려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죠.

궁핍을 타락의 언어로 그려낼 때 생기는 두 가지 효과가 있어요. 첫째, 이들을 우리 눈 밖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몰아내도 비난받지 않아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은 위험한 자들이니 쫓아내도 괜찮은 거예요. 둘째, 이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가난한 자가 옆에 있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부담을 느끼니까요. (...) 우리의 시야에서 이들을 사라지게 하는 데 가장 효율적이며 정당한 방법이 바로 '노동 윤리'예요. 제2 기계 시대, 소비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노동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노동 윤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바우만은 말하고 있는 거죠.

*note: 요즘은 노동윤리까지도 굳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것은 그 사람이 게을러서든 무능해서든 불가피해서든 그냥 혐오의 대상이다.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열심히 일해 얻은 부만 칭송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없이 얻은 부가 공공연히 선망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 이게 중요하다.

 

84%

이렇게 디지털 기술 발전의 역사를 돌아보면, 제2 기계 시대의 핵심적 권리로서 디지털 시민권이 왜 중요한지 더 절실하게 깨닫게 돼요. 디지털 시민권이 잘 구현되면 생활이 더 편리해지고,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으며 나아가 자유권, 정치권, 사회권이라는 세가지 측면을 모두 통합해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 디지털 시민권은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치에 직접 참여하며, 사회·경제적 기회를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한 권리가 되었다는 거죠.

(...) 디지털 시민권을 아주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어요. 마샬은 시민권을 "사회의 유산을 충분히 공유하고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기준에 따라 문명인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하죠. 인간과 기계가 동등한 파트너십을 맺어가야 할 제2 기계 시대에는 정보기술이야말로 문명인으로 살아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이제 '디지털 시민'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어요. 이런 이유에서 시민권의 한 영역으로서 디지털 시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디지털 시민으로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디지털 시민권을 연구하는 이들은 다음 아홉가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해요. (Mike Ribble & Gerald Bailey, <Digital Citizenship in Schools>, International Society for Technology in Education, 2007)

첫째, 디지털 기술을 통해 사회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디지털 접근성

둘째, 온라인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디지털 상업성

셋째,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디지털 소통

넷째, 디지털 기술이 필요할 때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디지털 가독성ditgital literacy)

다섯째,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이 지켜야 할 행위의 기준(디지털 에티켓)

여섯째,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 법적 권리와 제한(디지털 법률)

일곱째, 모든 디지털 기술 사용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특권 및 자유, 그리고 사용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행위(디지털 권리와 책임성)

여덟째, 디지털 기술 사용과 관련된 육체적·심리적 요소(디지털 건강)

아홉째, 모든 디지털 기술 사용자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개인적 안전과 네트워크 보안(디지털 보안)

(...) 여기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디지털 시민권을 시민권의 다른 세 영역을 보완하는 수단이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오히려 핵심은, 디지털 시민권이 이제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다는 거예요. 19세기부터 20세기를 거치며 보통선거권이 민주주의의 확산속에 평등한 시민의 필수적 권리가 된 것처럼, 제2 기계 시대에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과 활용 가능성이 평등한 시민의 삶을 누리는 데 필수 요소가 되었어요. 앞에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된 것이죠.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었다는 건 바로 이런 뜻이에요.

*note: 디지털 시민권의 취지에 대해 공감은 하면서도 내용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서 좀 길게 따라 써 보았다. 보통선거권에 비유한 것이 도움이 좀 되었지만, 보통선거권이 '다른 권리들을 가질 권리'이고 그 자체로서 목적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87%

2016년 기준으로 네이버가 4,321억 원을 낸 반면 구글은 200억원 정도밖에 내질 않았어요. 4,000억 원 이상 차이가 나는 거죠. 2018년 구글의 매출은 더 늘어나 6조 원 가량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걷을 수 있는 세금은 더 많겠죠. 여기에 페이스북, 트위터 등이 더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초국적 기업들에게 합당한 세금만 받아도 상당히 많은 재원이 걷힐 거예요. 이건 반드시 받아내야만 해요. 구글과 페이스북은 한국에서 올리는 매출이 얼마인지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요, 막대한 세금을 공식적으로 추징당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까봐 그러는 거예요.

*note: '반드시'란 말에서 저자의 숨은 분노가 느껴진다. 진짜, 너희는 AI 윤리 운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일단 돈 벌고 있는 나라들에 세금부터 정직하게 좀 내라.

 

 

88%

기본소득은 이처럼 노동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정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조건만으로 소비력을 갖추게 해 준다는 점에서 제2 기계 시대와 상응하는 제도라 할 수 있어요. (...) 탄소배출세는 기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고, 로봇세는 제2 기계 시대의 변화된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분배의 재원으로 적합하다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여러분이 꼭 기억해두어야 할 사항이 있어요. 기본소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소비력 향상이 아니란 점이에요. 이 제도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과 함께 지속적인 소비력이 가져오는 몇몇 효과에 있죠. 인간 존중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금방 이해가 될 거예요. 그렇다면 소비력이 가져오는 효과란 뭘 말하는 걸까요?

우선 사람들에게 부당한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협상력을 줄 수 있어요. 인간이 최소한의 지속적인 소비력을 갖추고 있다면, 부당한 환경에서 노동하는 걸 거부할 수 있게 되죠. 쉽게 말해 '갑질'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거예요. 둘째, 노동뿐만 아니라 가정 폭력, 성소수자 차별과 같은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어요. 사회적 약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여력이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면, 그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을 때 '그만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죠. 정리하면, '지속적인 소비력'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어막 역할을 해준다는 거예요. 

*note: 여기서 '소비력'이란 말이 적절할까. 소비력이라고 하면 소비자주의와 연결되는 것 같고 자본주의도 전제로 하고 있는 느낌이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 제도이니 당연하지,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소득이 궁극적으로 보장하려 하는 것은 부당한 것을 거부해도 생존할 수 있는 기반/조건일텐데, 어떤 단어가 보다 적합할까.

 

89%

2016년 피터슨 연구소에서 실시한 조사를 보면 전 세계 자산 10억 달러 이상 부자 중 이른바 '금수저' 출신으로 증여나 상속을 받아 부자가 된 경우가 30%인 반면, 한국은 이 비율이 74%에 이르고 있죠. 또 동국대 김낙년 교수가 내놓은 한국의 부의 집중도에 대한 연구를 보면, 한국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물려받을 게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2013년을 기준으로 상위 0.5%에 19.3%, 상위 1%에 25.9%, 상위 5%에 50.3%, 상위 10%에 66.0%의 자신이 집중되어 있는 반면, 하위 50%는 단지 1.7%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요. (...) 근데 더 절망적인 건 2019년 스위스 은행 '크레디트 스위스'가 발간한 <2019년 글로벌 자산 보고서>에 나오는 상황이에요.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상위 1%에 30%의 부가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라고 이 보고서는 평가해요. 부의 불평등이 이미 대다수의 국가에서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죠. 20세기 디지털 기술의 편향적 분배가 만들어 낸 결과가 지구적 차원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어요.

*note: 그런데 혼인 증여세 감면 이런 걸 정책이라고 내놓고..

 

92%

"21세기 새로운 기술의 시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은, 기술이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 발전이 우리 삶과 자본, 노동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본 긴 여정 끝에 우리가 더졌던 질문이에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는 여러분께 제1 기계 시대의 분배 기준인 '노동'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을 했었어요.

(...)

산업혁명을 통해 '신분 중심적' 분배가 종말을 맞았듯, 4차 산업혁명과 그린 뉴딜 등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세계는 '노동 중심적' 분배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어요. 도래하는 변화 속에서 계속 노동 중심적 분배를 유지한다면,(...) 혐오와 차별로 가득 찬 공정성 시비들이 그치지 않고 계속될 거란 생각이 드네요. 이제 틀에 박힌 '노동'이란 기준에서 벗어나 '탈노동적 분배 제도' 구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될 때가 왔어요. 

이런 발상 아래 저는 제2 기계 시대에 상응하는 권리로, 인간과 기계가 파트너십을 맺을 권리, 디지털 세계에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 권리가 시민권으로 확립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했어요. (... ) 거기에 더하여 제2 기계 시대가 만드는 불평등을 교정하고, 시대에 상응하는 분배재원이 될 로봇세와 구글세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어요. 

(...) 하지만 우리가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제2 기계 시대에 적합한 보호의 체계를 제1 기계 시대에서 찾거나 가져오면 안 된다는 점이에요. 이 책에서 제안한, 더 이상 노동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권리와 분배도 이런 숙고의 결과물이란 걸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해요.

*note: 탈노동적 분배 제도 구축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논의는 인상적이고 설득력있다고 생각한다. 관련해서 더 생각해보고 싶다. 

 

94%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군가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된다 하더라도, 왜 그것이 재화와 권력을 적게 할당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가?' 영의 문제 제기는 일리가 있어요. 역사를 돌이켜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엘리트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민주주의가 정당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평범한 이들을 주권자로 내세우는 민주주의는 플라톤 시대부터 엘리트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체제였어요. 그런데 왜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조차, 능력에 따라 자원과 권력을 할당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영은 이렇게 답해요. '능력주의란 평등을 받아들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불평등이란 모순을 비켜 가기 위해 작동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정당하다. 혹은 제한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마땅한 자격을,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겐 저항 없이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더해, 영은 이런 능력주의가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 내고, 새롭게 등장한 계층 사이에 높은 벽을 만들어 결국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하죠.

 

97%

사랑하는 이들에게 능력이란 덕목을 요구하는 대신, 보호라는 제도의 우산을 씌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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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들을 옮겨쓰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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