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야 청산 가자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유유히, 2023 본문
2%
헌신할 수 있는 일인가. 어떤 직업의 귀천은 그 질문으로 대강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2%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헌신인가. 불쉿 업무와 불쉿이 아닌 업무는 이 질문으로 대충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5%
2020년대 한국 소설가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지도 시장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알려지는 자리건 얼굴이 알려지는 기회건 가릴 처지가 아니다. 브이로그를 찍거나 유튜버가 된 문인도 여럿이다.
7%
운동과 식사에 하나 더 보태자면 수면이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잠자리에 들고 일정한 때 기상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보통 오후 11시 반쯤 자서 오전 6시 반 전에 일어난다. 늦잠을 자면 마음의 긴장이 풀리고, 그러면 하루를 망치기 쉽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한다.
* 나도 진짜 이렇게 살고 싶은데 안 된다. 내 스타일이 아니구나 포기해야 하나, 좀 더 노력해봐야 하나 모르겠다.
9%
남자든 여자든, 긴 글을 쓰려면 누구든 고정수입과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19%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직업 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 전문화되어서 리얼리즘 소설 쓰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생각도 한다. 문학의 힘이 약해진 데에는 그런 요인도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현실 세계의 깊은 구석을 잘 살피지 못하게 되면서, 전문 직업인 필자들의 에세이가 주목받게 된 것 같기도 하다.
27%
고백하자면 그런 만남 자체가 좀 즐거웠다. 참석자들의 지성이나 선량함과 관계없이, 문학 출판계 인사들이 모이면 어쩔 수 없이 패배주의적인 분위기가 깃드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안 일고, 우리가 뭘 해도 그런 추세는 바뀌지 않을 거야, 뭐 그런. 신문기자들을 만나도 비슷한 공기다.
그러다 영화나 드라마 기획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씩씩함이 반갑다. 벌이고자 하는 모험의 규모도 크고 도전의 성격도 신선하다. "이거 제작비 건지려면 중국을 잡아야 해요"라든가 "한국에서 아무도 안 해본 장르니까 제가 해보려고요" 같은 말들을 스스럼없이 한다.
* 맞다, 어떤 사람들은 혹은 어떤 판은 미소짓게 하는 젊은 패기가 있다. 덩달아 힘을 내보게 하는 씩씩함. 요즘 내게 너무나 부족한 것, 아예 없는 것.
30%
일간지 칼럼을 쓰는 데 보통 하루는 꼬박 걸리는데 과연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일일까, (...)
* 칼럼 하나에 하루 걸리면 엄청 빨리 쓰는 거 아닌가?! 나는 완전 감탄했는데.
31%
운동권문학, 민중문학과 거리를 두는, 우리 시대에 맞는 리얼리즘 노동문학소설을 쓸 작가들을 모은다.
* 굳이 '거리를 두는' 이라고 쓰는 이유는 뭘까.
32%
사람이 혼자 있으면 자꾸 전날이나 전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또 자기 자신에 대해 곱씹게 된다.
34%
엑셀 마니아인 나는 에고서핑을 한 횟수도 엑셀에 기록한다. 2021년에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한 횟수는 15회다. 지난해에는 12회다.
* 이것도 이 정도면 적게 하는 편 아닌가?
36%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는) 하루키 평생에 걸친 테마라 할 만한 그것-상실감이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이 가장 생생하게 담긴 작품들이다. 뭔가 삶에서 중요한 것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놓치고 있다는 감각. 그것이 너무 자연스럽고 불가항력적이어서 비통하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막막함. 그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포착. 그래도 남은 것들을 최대한 지켜보려는 막연한 의지.
36%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깨달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덜 흔들린다. 음, 나는 2차 판권 수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멋진 작품을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된 거였지, 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꽤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심지어 자존감도 좀 고양된다.
51, 54%
제 눈을 더 처지게 그려주실 수 없을까요, 제가 이렇게 똘똘하게 생기질 않았거든요, 라고.
(...)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다. 나도 내 소개가 될 수 있는 소설,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 그렇구나, 장강명은 눈이 처져서 착하고 순해 보이는 거였다. 하지만 실은 큰 야심가.
60%
기사 쓰는 게 괴롭다면 기자를 그만둬야 한다. 업의 본질과 다투면서 어떻게 그 일을 계속할 수 있겠나.
64%
이쯤에서 '산업재해로 숨지는 사람이 매일 2.5명씩 나오는 나라에서 왜 문학상 수상작 중에 중대 재해가 소재인 작품은 찾기 힘들까' 하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답은 간단하다. 너도 안 썼고 나도 안 썼기 때문이다.
64%
개인적으로는 2020년대 상황을 이야기하는 리얼리즘 노동문학에 내 자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 2020년대의 한국 노동자들은 자기 착취와 상호 착취에 시달리고 있고, 과거 민중문학의 틀로 이를 포착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 장강명이 자신의 문학사적 위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여전히 민중문학과는 굳이 선을 긋고 있다는 점도.
65%
나는 그런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데, 문단을 작품성을 심판하는 법원이나 문학성의 원천이 아니라 작은 취향 공동체로 보기 때문이다.
68%
* 장강명은 자신의 청소방법을 1-5번까지 꼼꼼히 적어두었는데, 나도 참고하려고 북마크를 했다. 하지만 막상 옮기려니 귀찮아서 따라 쓰는 것은 생략한다. 그의 청소방법을 보면 나는 진짜 더럽게 살고 있는 것 같다.
70%
내가 원하는 작가의 이상적인 일상은 이거다. 아침에 일어나서 소설 원고를 쓰기 시작, 배고플 때 식사하고, 낮잠을 조금 잔 뒤 또 원고를 쓰고, 다시 배가 고파지면 두 번째 끼니를 먹고, 또 원고를 쓰고, 자는 것. 그 사이사이에 운동을 하고, 집 청소를 하는 것.
* 집에 혼자 있는데 하루에 두 번만 먹나. 자제력 강하네.
71%
새벽이나 밤, 또는 모처럼 일정이 없는 날에 노트북 앞에서 '왜 이리 속도가 안 나지? 왜 이렇게 안 써지지?' 하고 머리를 싸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서 비로소 나의 집중력 메커니즘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때로는 기적을 빌고 때로는 스스로를 학대하며 한동안을 보냈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닌 거였고, 나는 몇 년 전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72%
2013년 하반기와 2014년의 고독과 집중력, 몰입감은 여전히 그립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무척 로맨틱한 시기이기도 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구분이 명확했고, 내가 아닌 것에 나는 가담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아주 잘 벼린 칼날이 된 듯했다. 현대인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감정이고 기회였다.
73%
박 편집자와 일하며 내가 얻는 것, 배우는 점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 어렵다. 그중 으뜸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 알려준다는 점이다. '당신은 한국문학에서 이런 계보에 속해 있으며, 이번에 올라야 할 산은 이 산입니다' 하고 말해주는 것 같다.
77%
한국 소설을 생산하는 구조는 어떨까? 어떤 사람들이 한국 소설을 쓰려고 하며, 그들은 어떤 교육을 받는가? 그중에 어떤 이들이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는가? 어떤 작품이 평단의 주목을 받고, 다른 작가 지망생들의 전범이 되는가? 그렇게 발표된 작품, 주목받은 작품들은 당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성공적으로 재현하는가? 소재의 선택이나 서술 방식, 주제의식에 있어서 편향이나 왜곡은 없는가?
나는 좀 의심한다. 예를 들어 상당수 독자가 '한국소설에는 유난히 대학 시간강사와 출판사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창작자들의 이력이나 활동 반경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또 나는 한국 소설에서 부유층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드물다고 느끼는데, 이는 한국 소설가의 소득 수준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 강조는 내가. 공감하기도 하지만 웃겨서.
77%
어릴 때 과학 시간에 자석과 철 가루로 자기력선 관찰 실험을 했다. 간단한 실험이다. 자석 위에 흰 종이를 올려놓고 그 위에 철 가루를 뿌린다. 종이를 살살 흔들면 철 가루가 움직이다가 특정한 선 모양으로 늘어선다.
(...)
나는 때때로 우리네 신세 역시 얼마간 철 가루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그 사회에는 여러 자석이 있다.
78%
나는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 강력한 '폭력의 자기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젊은 헌병들은 극도의 육체적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서서히 자기력선의 방향으로 늘어서게 됐다. 그 자기장의 원천인 자석은 말단 병사가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미국 국방부였다.
내가 만약 아부그라이브 수용소를 소설로 재현한다면 나는 철 가루가 아니라 자기력선을 묘사하는 방향을 택할 것 같다. 그래야 이 참혹한 인간성 상실을 일으킨 진짜 원인인 자석의 위치와 형태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런 태도에 대해 소설이라기보다 저널리즘에 가깝다거나, 기계적 균형을 맞추려는 듯해 불편하다거나, 피해자의 고통을 싸늘하게 바라본다는 등의 지적을 받기도 한다. '내가 다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오만하게 비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미숙함을 인정하고 언젠가는 철 가루와 자기력선과 자석을 모두 제대로 담는 멋진 작품을 쓰리라고 다짐하는 수밖에.
80%
그러나 최근 한 세대 사이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는 제도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뤘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실체 역시 과거보다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억압이 제도 속으로 들어갔고, 그만큼 학문적인 깊이를 갖춘 이론이나 합리주의의 탈을 쓰기도 한 것 같습니다.
80%
예를 들어 지금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과 어마어마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자기 착취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모습 역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동의하지만 현실에서는 자기 착취와 자기 계발과 자기 규율의 명이 뒤섞여 있는 듯.
84%
북한 주민은 한국 사회에서 투명인간이다. 한국인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북한 주민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다시 말해,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세계 최악의 독재와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눈을 가리고 살아간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은?
눈앞에서 세계 최악의 독재와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것을 증언하고 고발하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촉구하는 것이 문학의 사명 중 하나 아니겠는가? 그런데 북한 문인들이 그 일을 했다간 가족과 함께 즉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테니, 한국 작가들이 그 일을 대신 해야 하지 않을까? 반복하자면 바로 옆에 사는 데다가, 외국 작가들은 그럴 뜻이 있어도 한국어를 익히기 어려워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말이다. 하필이면 북한을 제외하고, 북한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국어로 쓰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
87%
내 옆집에 사는 남자가 아내를 폭행하고 자식을 굶길 때, 내게는 도덕적 의무가 생긴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의무'다. 옆집 가족이 내 친척인지 아닌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아우슈비츠가 들어설 때 유럽인들에게는 모두 그런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 그런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명령을 받기 위해 굳이 자신들이 유대민족이라거나 게르만족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인간이기만 하면 됐다.
나는 나를 비롯한 젊은 한국 작가들에게 새로운 도덕적 의무가 생겨나고 있다고 느낀다. 거대한 억압과 불의 바로 옆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의무가 생긴다. 그리고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 같은 관념에서 멀어지는 것이 오히려 그 의무와 방향의 모습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주리라는 게 나의 제안이다.
* 이번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가 북한 인권에 관한 것이다. 나 역시 눈 가리고 살던 사람 중 한명이었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동의하고 필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마지막에서,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 같은 관념에서 왜 굳이 멀어져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북한을 '이웃나라'보다는 가깝게 여기고 통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모르겠다, 내가 옛날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통일에 대해 깊게 생각한 적 없어서인지도.
90%
세계는 적의로 가득 찬 곳이었고, 그게 적의에 맞서는 나의 방식이었다. 나를 해치려는 세계를 해치고 싶다. 그러면서 나는 세계를 이루는 적의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그와 완전히 다른 응답을 <피프티 피플>에서 본다. 가냘플지 몰라도 누구를 해치려는 마음은 아닌 것들. 아니, 오히려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는 의지.
94%
하재영 작가를 만난 일이 있다. 전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도 인상적으로 읽었다. 무척 기품 있는 사람이라고 느꼇다. 나는 막연하게 그녀가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일 거라 상상했는데, 틀린 짐작이었다. 어렸을 때 부유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0대 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의 품위는 소득이 아닌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 10대때까지 부유했으면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인 건 맞는 것 같은데. 그게 작가에게서 느껴진다는 기품과 연관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99%
지난 몇 년간 내가 어려울 때마다 옆에서 도와준 김혜정 그믐 대표와 유유히 출판사의 에디터리 대표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 장강명의 책에 나오는 "HJ"의 실제 이름이 뭘까 궁금하곤 했었는데, 내겐 왠지 아무 이유 없이 '희진에게'로 읽히곤 했었는데, '혜정'이었다.
'오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사람', 홍은전, 봄날의책, 2020 (0) | 2023.08.01 |
---|---|
피프티피플, 정세랑, 창비, 2016 (0) | 2023.07.30 |
Returning to reims, Didier Eribon 씀, Michael Lucey 옮김, Semiotext(e), 2007 (0) | 2023.07.04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다쓰루 저, 김경원 역, 2018, 원더박스 (0) | 2023.06.25 |
오지은, 마음이 하는 일, 위고, 2022 (0) | 2023.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