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야 청산 가자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다쓰루 저, 김경원 역, 2018, 원더박스 본문
4%
언어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한다기보다 우리 자신이 언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 얼마나 양질의 언어인가, 어떻게 생긴 언어인가, 어떤 특성을 지닌 언어인가에 따라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 감각, 삶의 방식이 송두리째 영향을 받습니다.
영어를 솜씨 좋게 구사하게 되었다는 것은 '영어를 모어로 삼는 종적의 사고방식, 감각'을 내 몸에 새기고 각인시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사람들은 실로 자각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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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무언가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독자에 대한 경의가 없습니다. 독자에 대한 공포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수는 심사하는 사람이니까요. 비위를 거스르면 학점을 받지 못해 졸업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공포와 경의는 다릅니다.
경의의 자세는 '부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부탁입니다. 내게 합격점을 주세요.'하는 간청과는 전혀 다릅니다.
경의는 '나와 독자 사이에 먼 거리가 있다'는 감각에서 생겨납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보통 말투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 '멀다'는 감각이 있으면 자신의 '일상적 언어 사용'을 벗어나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필사적으로 손짓발짓과 다양한 표정을 동원하고 온갖 언어 표현을 시도하겠지요.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 '마음을 다하는' 태도야말로 독자를 향한 경의의 표시인 동시에 언어가 지닌 창조성의 실질이라고 생각합니다.
* Note:강조는 원문
46%
'모릅니다. 가르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배움을 구성하는 요소를 최소한으로 줄여 말한다면 이 세 마디 말로 집약되지 않을까요? 자기 무능함의 자각, '멘토'를 찾아내는 힘, '멘토'에게 가르쳐줄 마음을 생기게 하는 예의범절, 이 세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인간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 계층사회의 무서운 점은 하위 계층에만 '배우지 않는' 자세를 선택적으로 권장한다는 점입니다.
47%
학습 노력으로 문화자본을 획득한 사람들(프티부르주아)에게 교양이란 학식과 동의어입니다. 따라서 '교양 있는 사람'이란 '학식의 방대한 보고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믿어 버립니다. 교양이란 결국 문화에 대한 관계일 뿐이라는 것, '모든 것을 잊어버린 뒤에 남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Note:강조는 원문
48%
일본에서는 '학문의 질'과는 별도로 학문적 앎을 '얼마나 널리 공유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습니다. 모처럼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에 대해 가치가 있는 지식을 얻었다면 될수록 다수의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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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하고 싶은 것'이 먼저 있다는 텍스트관이 '신이 먼저 있다'는 우주관과 상동 관계라는 것을 통해 유추하자면, '텍스트가 먼저 있다'는 텍스트관도 어떤 종류의 우주관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사회적 현실이 먼저 있다', 좀 더 한정적으로 말하면 '계급적 현실이 먼저 있다'는 사회관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종교적 언어관에 대해 비교적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적 언어관을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 Note: 잘 동의는 안 됨. '텍스트가 먼저 있다'가 맑스적 언어관, 유물론적 관점이라고?
81%
그러나 외국어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 있다는 동기 부여로는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방향이 거꾸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 학습의 의의는 원래 자신의 종족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나 존재하지 않는 감정, 알지 못하는 세계의 관점을 다른 언어 집단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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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앞으로 영어가 국제 공통어가 된다면 영어 자체의 우주관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법과 어휘는 공통일지라도 각각의 모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실어 나르는 사이에 그 말의 중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어 자체가 품은 우주관의 구조가 와해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어 화자의 세계관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언어의 우리'가 지닌 구속력은 잃어버리고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홍콩 사람의 영어를 들으면 중국어를 영어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인의 가치관 위에 영어를 얹어놓고 있지요. 한국인의 영어는 한국 영어, 필리핀인의 영어는 필리핀 영어, 일본인의 영어는 일본 영어가 됩니다 .일본인은 영어의 주절, 종속적이라는 계층 구조를 잘 모릅니다. 계층적인 우주관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먹고'와 같이 계층구조 없이 줄줄이 글을 나란히 이어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일본인은 일본인이 쓴 영어를 읽기 쉽다고 느낍니다.
* Note: 한국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길 때 가끔 한국어에서 썼던 접속사가 영어로 옮기면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컨대 한국어에서는 '따라서' 같은 것을 글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종종 쓰기도 하는데, 영어에서 그 말을 그대로 옮겨서 넣으면 논리적으로 정말 앞뒤가 인과관계가 아니라면 왠지 어색하게 들리는 것이다.
86%
모어의 현실이란 본질적으로 국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구조화하고 있는 우주론도, 그것을 질서 정연하게 만드는 논리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미의식도 모두 국지적입니다. 지역이나 기간이 한정적인 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모어의 현실만 주어져 있지요. 우리는 그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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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모험은 정형을 충분히 내면화한 인간에게만 허용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한번 '모범적인 모어의 사용자'라는 집단적인 동의가 형성되면 그 이후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은 자동적으로 공인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언어를 조합해도, 어떤 신조어를 만들어내도, 어떤 문법적인 파격을 시도해도 용인됩니다. 왜냐하면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압니다. 들은 적이 없는 말이라도, 본 적이 없는 숙어라도 그 사람이 쓰면 '압니다'. 그런 언어 사용자가 되는 것, 그것이 아마도 생성적인 언어와 만나는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합니다.
90%
학문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어느 전문 분야라도 선구자는 전인미답의 땅에 발을 내딛어 길을 개척하고, 도로 표지를 세우고, 계단을 깎고, 위험한 곳에 난간을 만들어 나중에 올 사람이 안전하게 가도록,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이 배려의 집적이 전문 영역의 집합적 지혜를 형성하지요. 그러므로 어느 영역이든 선두에 선 사람의 책무는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91%
사회적인 지위 상승이나 자원 분배의 유리함을 위해 지적 능력을 사용하려고 하면, 결국 자기나라 사람들이 될수록 무능하고 나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의 분배 비율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니까요. 만약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 경쟁 원리를 채용해 자국민이 무능하고 나태할수록 지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이득을 보는 규칙으로 사회를 운영했다면, 일본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93%
나는 지금 시대에 인문과학은 한 번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연과학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통감합니다. 특히 내 주위에는 친하게 지내는 의료 관계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기들의 연구가 눈앞의 현실에 깊이 관여하고 있고, 자기가 잘 버티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는 절실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문가들만의 '끼리끼리'라는 울타리에 갇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문가끼리 공조는 필요하지만, 이를테면 감염증의 경우 팬더믹을 막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쓸' 필요가 있습니다. 감염증을 이해하고 방역에 협력하는 사람을 어떻게 늘리느냐 하는 문제가 긴급해집니다. 따라서 온갖 분야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요. 자신들의 의료 활동은 이런 것이니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달라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비전문가에게도 협력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알기 쉽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최첨단에 있는 사람들 중 서재에 틀어박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93%
그와 반대로 '바깥을 향한 언어'에는 적합성 여부나 품질에 대해 수치적인 평가를 내리는 심사위원이 없습니다. 그것은 채점자 앞에 제출한 '답안'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것은 정확도가 높은 평가가 아니라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수신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조건에서만 언어는 생성적인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정과 도리에 맞게 이야기한' 언어, 수신자의 소매에 매달려 '부탁이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하는 간청의 언어만이 '바깥을 향한 언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수사적으로 아름답다든가 논리적이라든가 내용이 정치적으로 옳다는 차원과는 관계없이 '전해지는 언어'와 '전해지지 않는 언어'가 있습니다. 아무리 비논리적이라도, 아무리 알아듣기 어려워도, 모르는 말이 많이 있어도, '전해지는 말'은 전해집니다. 어떤 언어든 뜻이 명료하고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아름다운 운율을 실어 말한다고 해도, '전해지지 않는 말'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차이는 바로 하나뿐입니다. '전해지는 언어'에는 '전하고 싶다'는 발언자의 절박함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면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언어를 움직입니다. 뜻하지도 않은 곳까지 언어가 닿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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