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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문학동네, 2022 본문

오르골

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문학동네, 2022

나풀  2023. 8. 17. 03:41

재미있는 소설집이었다!
'하긴'은 환멸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내가 늘상 떠벌이고 생각하는 것들도 멀리서 혹은 나중에 보면 다 이런 꼴일까 싶어 착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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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6
네 딸년들은 파브르의 시점에 있겠지. 내 딸이 식별 불가능한 개미의 얼굴을 하고 흙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복잡한 개미집을 짓고 있는 동안, 물웅덩이 앞에서 한없이 당황하는 동안, 네 자식들은 조감하며 거기가 아닌데, 그렇지 거기지, 하겠지.
 
21/126
당시 오지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몇 해째 교수 임용에 떨어져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였다.
강사를 시작하던 마흔 살 무렵에는 전혀 초조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진하지 않았고 학계의 물정도 알 만치 알았다. 그리고 다들 그랬다. "요샌 쉰이 마흔이고, 마흔이 서른이야. 옛날과 나이 감각이 완전히 달라. 마흔다섯엔 쇼부가 나겠지. 설마 쉰까지 보따리장사 하진 않겠지..." 힘이 되던 그 말이 점점 족세가 되었다. 그 말에 기댔을 때 이미 쉰 살의 시간강사라는 가능세계는 닫힌 셈이었다.
 
25/126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남이 나에게 한 잘못 때문에 잠 못 이루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남에게 한 짓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나 간다."
규가 휠체어를 힘껏 밀었다.
규는 스스로 멈출 수 있어서 기뼜다.
휠체어 바퀴가 모래에 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 note: 문장배치가 첨에는 웃겼고, 따라쓰면서는 웃긴 것만은 아니구나, 생각해보게 된다.
 
33/126
주문/초롱 조롱! 초롱 조롱! 문사, 가자!
인용/
"그리고 이모님, 이건 지엽적이지만,"
아이 아빠가 말했어.
"왜 방에서 생리대를 가세요? 왜 화장실 놔두고 방에서 그래요? 도대체 어떤 여자가 더럽게 남의 집 안방에서 바지 내리고 생리대를 가느냐고요!"
 
34/126
"수박 먹을래?"
책상에 앉은 초롱이 발로 냉장고 앞 의자를 당겼다.
"하우스라 비싼데 맛있어."
"선생님이세요?"
"비싼데 맛있다? 비싸서 맛있다? 뭐가 맞으려나. 모르겠네. 초롱씨는 어떻게 생각해?"
초롱은 잠시 선생을 보다가 수박을 먹었다. 비싸고 맛있었다. 소설을 잘 가르치지만 잘 쓰지는 못하게 된 중년의 작가들이 있다. 초롱은 그들을 떠올렸다. 올드함을 알아보지만 올드함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그들은 밋밋한 병렬을 못 견뎠다. 끝내 엮어야 안심했다.
 
35/126
"루시는 이해했지. 비인간적인 폭력을 당해온 사람과 화해하려면 비인간적인 폭력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자기 학대로 보여도 극단적 고통을 겪은 사람과 공존하려면 똑같은 일을 당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루시는 적어도 한 사람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어. 한 명쯤은 상대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외치기 전에 먼저 자기 눈알을 터뜨리고 이빨을 부숴야 한다고. (...)"
(...) 그러니까 한 명의 억울함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쯤은 있어도 되는 것이다. 철저히 억울한 사람이. 억울함과 딱 붙어 지내온 여자들을 위무하기 위해여. 그의 퍼포먼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라고, 총애 초롱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50/126
"네 말 다 맞아. 근데 맞는 말도 하지 마."
안파 쪽 남자가 당황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에서 삐친 기운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그러게 왜 네가 우리 선언문을 쓰냐. 그리고 부탁인데."
평파 쪽 여자도 합세해 남자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네 맘대로 나를 여자 박스에 넣지 말아줄래? 내가 들어가고 싶을 때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오케이?"
이제 남자는 완전히 기분을 잡쳤다. 그러자 속에서 '평대스러움'이 조금 스멀댔다.
 
54/126
수진도 그중 하나였다. 종종 회비를 낼 수 있었지만, 원칙상 얻어먹어야 했다. 수진은 회비를 안 내는 대신 설거지를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고, 부엌에서는 거의 몸싸움까지 벌였다. 수진은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다른 무언가를,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무언가를 몰아서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
세상에 공짜는 없고 나는 괜찮아. 개수대에서 경쾌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도 일하고 있으니까. 처지 노동중이니까. 존재 노동중이니까. 저 사람들, 내 덕에 달콤한 단차를 느낄 수 있어. 베풀 수 있어. 언제나 베푸는 쪽이 베풀어짐을 당하는 쪽보다 나은 법이지. (...) 나는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누구에게도 아무것에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 고마워하는 순간 더는 이곳에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감사는 감정이고 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수진은 그만 고마워져버렸다. 여러 날을 거쳐 여러 일을 겪으며 그렇게 됐다. 그리고 고마움은, 염치는, 때로 사람에게 가장 헐하고 험한 일을 시킨다.
*note: 공감의 밑줄을 죽죽 그으면서 읽었다.
 
62/126
그녀는 자신의 소설을 종이 뭉치라 불렀고,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내리려 했고, 종국에는 '내리다'라는 표현도 지우려 했지만, 그 안에 어떤 자격지심 같은 게 있다는 걸 모르지 못했고 그럼에도 그것이 자신의 투쟁임을, 비밀스러운 투쟁임을 알았다.
(...) 
하루 중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겨우 밤뿐이었다. 어떤 루틴을 축 삼아 밤을 보낼 것인가,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한땐 수영이 축이었다. 이제 그녀는 일 년에 두 편의 소설을 쓰고 두 번의 반려 통지서를 받았다. 그것을 축 삼아 그녀의 일부는 살아갔다. 그 시간대의 그녀는 다른 시간대의 그녀와 비슷하지만 달랐을 것이다. 남자가 침범한 건 바로 그 시간대였다.
 
64/126
그러나 그 편집자는 적어도 투고자에게 '당신도 첫 문단만 읽으면 각이 나온단 말을 믿어?' 같은 항의를 받지는 않았다. 각은 나올 수도 있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각 이후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 줄 만에 각이 나왔네, 쓰레기네, 누가 또 일기랑 소설이랑 구분을 못했네... 그는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그에게 그건 눈 밝음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였다. 자신을 어떤 인간으로 보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읽을 가치가 없을 게 뻔한 원고를 집에 들고 가 맥주 한 캔을 놓고 밤새 꼼꼼히 읽었다. 그러곤 분노에 찬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에게서 편지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보다 성실한 독자는 없었다. 그보다 열정적인 인간은 없었다. 그보다 화가 난 비평가도 없었다.
 
68/126
버려진 공터에 잠든-사실 살인 마마들은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성난 아기들이 무덤을 맨발로 푹푹 밞으며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살인 마마들은 분명 살인마들이지만 다른 살인마들만큼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그들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살인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그렇기에 그들의 영혼은 빛나는 '카인의 별'에서 오지 않았다.
 
74/126
사장이, 보이가 우리끼리 있을 때 "사장 새끼 책 점 치는 거 진짜 짜증나"라고 했던 바로 그 행동을 했다. 사장이 물었다.
"그래서, 이 책에선 어떤 부분이 제일 좋았어?"
보이는 그걸 '책 점'이라고 불렀다. 사장이 독후감을 빙자해 우리의 수준과 사연을 알아내려는 수작이라는 것이었다.
 
82/126
우리는 위로를 받는 데 익숙했다. 부모 흉을 실컷 보면 누구든, 자신이 우리 부모보다 나은 부모라는 기분에 취한 그 누구든 우리를 가엾게 여겼기 때문이다.
 
86/126
그들은 부모가 잠들면 집에서 빠져나와 밤길을 쏘다니며 놀 곳을 찾아 헤맸다. 새벽 거리를 뛰어다니다 폭주족을 보면 숨었고 산에 오르려다 들개가 고개를 내밀면 도망쳤고 공원의 이슬 맺힌 잔디를 차고 다니다 유릿조각을 발견하면 꼼꼼히 주웠다. 시멘트 양성중인 빈 가게에 고양이를 들여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둘둘 말린 밤의 장막을 펼치듯 앞으로 힘껏 달려나갔고, 밤이 역습하듯 폭주족과 들개와 유릿조각을 휘두르면 뒤돌아 또다시 힘껏 달렸다.
 
107/126
그러나 목경은 무수한 의도 중에서 실오라기 같은 악의를 건져올리려는 결벽증을 버린 지 오래였다. 고모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사람들은 시간을 벌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이 (결코 하고 싶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하기 싫은 일로 바뀔 때까지 숨 돌릴 틈을 얻었다.
 
작가의 말
122/126
"그래도, 다른 사람이 너를 무서워하는 것보다는 만만하게 보는 것이 낫지 않니?"
이 말에는 여러 맥락-이모와 내가 공유하는 우리 집안의 역사나 직업의 특수성 같은-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대체로 쉽게 보여 부당한 대우를 받느니 차라리 상대를 오들오들 떨게 만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풍길 수 있는 인상을 단 두 가지, 무서움과 만만함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원칙적으로 후자가 낫다는 것을 이모는 말하려 한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두려움을 심는 일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사람을 얼고 굳고 작게 만들며 '나까짓 것이 무슨' 하는 자조와 포기를 품게 한다.
*note: '무서움'과 '만만함' 중 타인의 입장까지 고려해 '만만함'을 택할 수 있는, 작가와 이모가 공유하는 집안의 역사나 직업의 특수성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만만하게 여겨져서 당해본 기억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가. 진짜 만만하지는 않은 사람들이어서 만만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반전을 먹여줄 수 있는 사람들인가. 약할수록 보호의 위장이 필요한데, 이 사람들은 상대가 두려움에 주눅드는 것을 걱정해 만만해보이길 택할 만큼 강하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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