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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벌레들

20230810 말복

나풀  2023. 8. 12. 02:25

내가 다니는 학교에 한국음식에 엄청 관심이 많고, 잘 만들어 먹는 노르웨이 사람 P가 있다. 근데 그 범위와 깊이가 엄청나다. 각종 김치류는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조림, 나물, 생채, 무침, 볶음 등의 밑반찬을 해먹고, 떡, 강정, 묵, 양갱 같은 것도 만든다. P는 또 베푸는 것을 좋아해서 학교에 자기가 만든 음식을 종종 갖고 온다. 어제가 한국의 말복이라고 (듣기 전까지 나는 알지도 못했다) 삼계탕을 비롯해 여러 한국음식을 가져와서 몇몇 학교 사람들과 같이 먹었다. 

삼계탕("삼계탕 팩으로 된 거 넣어서 인삼, 당귀, 엄나무, 오가피 같은 거 들어갔어요"라고 했다. 나는 인삼 빼고는 나머지 뭔지도 모른다), 오곡밥("네 종류 넣어서 오곡밥 아니고 사곡밥이에요"라고 했다. 들어간 사곡을 알려주었는데 까먹었다), 장조림, 시금치나물, 무말랭이, 마늘쫑, 열무김치(열무를 비트로 대체), 무생채, 오이무침, (직접 만든) 청포묵 샐러드, 풋고추+양파+쌈장이 P가 가져온 음식이다.

쓰면서도 신기하다. P에게는 이것이 일종의 취미생활일텐데, 취미에 이 정도로 진심이구나, 싶다. 이곳에서 그 먼 나라의 음식을 이 정도로 열심히 연구하고 제대로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저 감탄스럽다. 덕분에 나는 가끔 한국에서도 잘 못 먹어본 음식을 여기 노르웨이에서 가끔 얻어먹는다. P는 지난 설에도 사람들을 불러서 떡국과 각종 전들(꽃과 잎 장식까지 얹은)과 잡채, 식혜와 떡을 만들어 먹였다. 오갈데 없는 나도 불러주어서 한 자리 끼어 같이 먹었다.

이걸 쓰게 된 것은 내가 P의 한국음식을 그토록 많이 얻어먹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쓴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다. 늘 혼자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나는 여기서 한국인을 그리 적극적으로 찾아 만나는 편은 아니다. 전에 한번 크게 고생했던 적도 있고, 아 여기선 keep in touch할 이유가 중요하구나, 내가 딱히 keep in tough할 만한 이유는 없는 사람이구나, 깨닫게 됐다. 연락이 끊어지면 끊어지는대로 최소한 질척거리지는 말자고 그냥 내버려둔다. 사실은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인 것도 안다.

외국인의 경우에는 일단 언어장벽이 너무 큰 것 같고 - 예의바른 대화로 친해지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 나의 극 I 성향도 큰 몫을 한다. 노르웨이인들은 기본적으로 I인 편이고, 정기적으로 보며 약간의 대화를 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친해지는 것은 정말정말 쉽지 않다. 

모르겠다. 나는 인간관계는 사실 거의 포기했다. 내게 그것이 아주 큰 가치를 갖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살아가며 겪는 작은 친절, 순간의 환대에라도 그때그때 충분히 감사를 전하며 살자는 생각이 들어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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