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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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서 나는 예언의 내용보다는 그 형식이 언어여야만 한다는 게 더 흥미롭다. 어떤 예언가가 환상 속에서 미래의 뭔가를 봤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지식 수준에 맞춰 언어로 표현해야만 한다. 실제로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모를까, 그걸 언어로 변환한 이상 그 진의는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게다가 번역까지 된다면 왜곡은 피할 길이 없다. 결국 예언은 그 형식 때문에 빗나갈 가능성이 많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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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옆에서 보면 두꺼운 알이 하얗게 보이는 안경을 쓴 외삼촌이, 아직은 사십대였던 외삼촌이, 평생 책만 읽은 가난뱅이 책벌레 외삼촌이, 꼼꼼한 교열자로 유명했으나 인터넷과 검색기가 교열을 대체하면서 20세기와 함께 쓸모가 사라진 외삼촌이 자기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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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하나를 계속 선택하는 도박에서는 지면 질수록 그다음에 이길 확률이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면서.
note: 처음 든 생각은 도박은 독립시행이라 다음 승패확률은 여전히 50%인데,였다. 작가는 지금까지 계속 지기만 해온 인생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같은 곳에 계속 걸면 이길 확률, 곧 평범한 미래를 얻게 될 확률이 100%에 수렴하게 될 거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실패만 해온 인생이라 하더라도 신은 무심하고 다음 승패의 확률은 여전히 50% 아닐까? 아니 그 전에, 실패만 해왔다는 것은 주사위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승보다는 패가 더 잘 나오는 주사위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럼 다음에 이길 확률은 사실 50%도 안 되는 거 아닐까?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인생의 사건들은 사실 독립시행이 아니라는 것. 이전의 실패는 다음의 승패 확률에 영향을 미치고, 한국에서 이전의 실패는 대개 다음에도 패할 확률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면 50:50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싶어지는데.
작가는 어떻게 저런 낙관으로 전환했지? 책을 읽으며 내내 생각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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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23%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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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죽여주십시오, 하느님. 저는 죽어야만 합니다. 제가 죽어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녀에게 올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따라해보라시며,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보라시며. 정난주가 머뭇거리며 그래도 되느냐고 묻자, 하느님은 그래야 된다고 말씀하셔. 그녀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그 말을 따라 해.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라고. 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은 흡족해하셨지. 그녀의 기도는 받아들여져. 대정읍으로 압송돼 관비가 된 그녀는, 그럼에도 삼십칠 년을 더 살아 할머니로 죽고, 그러는 동안 그녀의 아들은 얼마든지 살 수 있었지. 그 하루하루는 늘 새 바람이 그녀 쪽으로 불어오는 나날이었다고 해.
32%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서부터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마음껏 생각하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 그 소설가가 "모든 글'쓰기'는 글'짓기'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아빠의 그 말을 떠올렸어요.
33%
혼돈과 카오스의 상태로라도 제 곁에 아빠가 남아 있는 게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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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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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73%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74%
지훈은 이제 서른다섯 살이 됐다 .서른다섯 살이란, 앉아 있던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방이 툭 트인 들판에 적막하고 고요하고 쓸쓸하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와 같은 삶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고.
(...)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78%
추국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한때의 벗이었던 그들이 서로를 부인하고 고발하는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어. 그때 다산은 삼십오 년 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날 무렵의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못했겠지. 하지만 유배에서 돌아와 죽음을 앞둘 때의 다산은 분명 삼십 오 년 전의 자신을 생각했을 거야.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82%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박혜진 해설
87%
외삼촌의 이야기에는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동시에 인간이 경험하는 비극의 핵심에 가닿는 진실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해 슬퍼진다는 것. 그러므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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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육체의 시간 속에서 비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김연수는 무한한 정신의 시간 속에서 낙관할 수 있는 "깊은 시간의 눈"(<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 대해 말한다.
note: 책갈피 꽂아두기는 했지만,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유한한 육체를 가진 우리가 무한한 정신을 가질 수 있을까? 240년이 무한은 아니잖아.
87%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 푸코에게 '영성'은 철학과 대등한 지적 체계였다. 이때의 영성은 나를 변형시키는 정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기와의 관계 맺기'와 '자기 돌보기'의 핵심을 의미한다. 거대의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
note: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이야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래서 내가 학자는 못될 것 같기도 하다.
88%
이들에게 세번째 삶이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실천하고 낙관을 확신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89%
'나'만이 지켜낼 수 있는 세계가 있을 때 우리는 절망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절망을 모르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억하는 미래는 우리 삶을 바로 그 미래로 데리고 간다.
91%
그날 이후의 나날은 "늘 새 바람이 그녀 쪽으로 불어오는 나날"이었다는 말이 행복으로 가득한 날들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난주와 은정은 인생에 KO패를 당한 이후에도 그다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삶에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은 더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비로소 은정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이 왜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말인지 이해하게 된다.
작가의 말
95%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의 괴로움 앞에서 내가 무기력했던 이유는 그게 두번째 화살이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첫번째 화살에 비유했다. 그리고 첫번째 화살을 뽑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누가 쏘았는지,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당해야만 하는지 따지다가 다시 맞는 화살을 두번째 화살이라고 말했다. 두번째 화살은 뽑고 난 뒤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 여전히 첫번째 화살이 있으니까. 뭔가를 했는데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니 두번째 화살 앞에서 사람은 점차 무기력해진다.
그와 달리 첫번째 화살을 뽑고 나면 즉각적으로 기쁨이 찾아온다. 그건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에 찾아오는 기쁨, 단순한 기쁨이다.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만족스럽지 않고 때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품에 안아야 한다. 그게 바로 첫번째 화살을 뽑는 일이다. 몸은 힘들겠지만 고통과 불만족을 겪어내면 이윽고 단순한 기쁨이 찾아온다.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여기에 단순한 기쁨이 있다
note: 그렇구나. 나도 두번째 화살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구나. 하지만 모르겠다. 첫번째 화살을 뽑고 싶지만, 첫번째 화살을 뽑아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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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이 책을 두고 '현재 삶이 절망적이어서 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쓴 책' 같다고 했다. 나도 김연수의 개심의 간증을 좀 듣고 싶어서, 나도 어떻게 좀 배워 볼 수 있을까 하고 읽은 것도 있다.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난주에게 백석에게 저런 서사를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관노가 되어서 남은 평생 자식도 다시 못 보고 늙어죽었대.", "체제찬양시 쓰다가 더이상 작품도 못 쓰고 늙어죽었대." 한 사람의 인생을 후려치는 저런 말들이 나는 너무 무섭다. 후려치려고 해도 후려쳐지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어느새 늙고 별볼일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으로서는, 그냥 지금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조금 더 다정해졌으면 좋겠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감각으로는 미래를 고려한다고 해도 길이 하나로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의 서사에 대해 어떻게 긍지를 가질 수 있을까. 내게는 또 다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