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웃, 김애란, 창작과 비평, 2021 겨울(194호)
다른 기사를 읽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제목을 보고 클릭했다가 컬럼에 언급되어서 읽은 소설. 지금 시점에 읽으니 조세희 헌정소설처럼까지 느껴진다. 2021년이면 코로나 K-방역이 한창이었고,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노동가치가 곤두박질치고 자산가치가 치솟는 것을 보면서 혼란과 절망을 느끼던 때다. 그 생각과 감정을 써준 것이 소중하다.
p.끝4-5
그런데 그 부분을 확인하려는 순간 센서등이 꺼지며 마치 누군가 입김으로 초를 불어 끈 것처럼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허공에 팔을 저으며 센서등이 켜지길 기다렸다. 잠시 후 주위에 노란 불빛이 비쳤다. 나는 그 빛에 의지해 남편이 밑줄 그은 문장을 눈으로 천천히 따라 읽었다.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Note: 처음 읽을 땐 너무 극적연출이지 않나 생각했는데 다시 읽으니 그럼 어때 싶기도 하다. 어차피 이 뒤로는 연극 독백 같기도 하고,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대놓고 하고 있으니까 힘 좀 주면 어때 싶다. 인용된 구절을 함께 읽는 것만으로도 나도 눈물이 나고, 이 구절의 맥락과 배경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수사법이 아니라 정말 궁금하다. 나에게 신애는 이름째로 기억하는 얼마 안 되는 소설 속 인물 중 하나인데, 이것은 얼마나 보편적인 감상일까.)
p.끝2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 욕구, 생존 욕구 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런 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은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Note: 작가라 그런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구나 싶었던 부분. 그렇구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나 봐. 생존이 걸린 불안의 문제, 탐욕이 아닌 욕구의 문제라서 어쩔 수 없다고. 무엇이 사람들을 여기까지 내몰았나 화가 치밀다가도, 결국은 다 자기합리화잖아 싶기도 하고.)
p.끝1
(...) 그리고 내 손의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계속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Note: 세상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신애만큼은 살자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신애만큼이라니, 얼마나 큰 꿈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