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사계절, 2018
작년 말에 읽었던 책이지만 남겨둔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람이 쓸 수 있는 책. 사고실험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기도 하고, 타인과의 상호존중이라는 자기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으로 이어지는 길을 내려 한다. 책갈피들을 남겨뒀었는데 전자도서관 책이라 자동반납되어버리는 바람에 다 날아가버렸다.
정체성을 수용하려는 노력과 관련해, 나는 나의 오랜 문제인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가난한 이들의 연대를 말하는 이들을 종종 냉소하곤 했다. 내가 아는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는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이상한 이름을 가졌었는데, 어디서 말해도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거나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가정형편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어서 (그 이름을 먼저 꺼낸 사람을 나는 한 명 봤다. 카드 모집 알바를 할 때 내 관리자가 주소가 그 아파트인 사람은 신청서를 받지 말라고 했다), 나는 주소를 말하는 것이 늘 곤혹스러웠다. 내 생각에는 입주자들이 좀 모여서 대외적으로라도 좀 예쁜 이름으로 바꾸자, 하면 금방 고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았는데 끝내 바뀌지 않았다. 왜냐면 그곳은 거지같은 집 어서 돈 모아서 탈출해야 할 곳이었기 때문에. 이웃과의 교류 같은 것도 없었고 반상회 쪽지 붙은 것 한 번 못 봤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의 연대라고? 난쏘공에 나오는 이웃같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나?
가난은 정체성이 아닌 걸까? 가난은 노력을 통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가난같은 것을 정체성으로 가지려는 사람은 없는 걸까? 예컨대 인종이나 성정체성이나 장애같은 것은 바꿀 수 없거나 바꾸기 극히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으로 수용하고 긍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지만, 가난은 정붙이고 살기보다는 탈출하려 애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으니까?
나는 처음에 이 책에 나오는 고뱅의 부모들이 악취미라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고 난 다음은 동의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전에는 장애를 어쨌거나 어떤 '결손'의 상태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장애가 다른 '능력'이기도 하고, 그래서 장애를 일부러 다시 선택하겠다는, 나아가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내가 느낀 저자의 어조는 '이런 사람들도 있다고 해~'에 가깝다. 약간 조심스러우면서 자신의 입장도 아직은 유보상태지만 이런 결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라고 알려주는 듯한) 그런 생각을 정신승리네, 하지 않고,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는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인정투쟁에 자식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다. 이것은 예컨대 골프를 엄청 잘 쳐서 큰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이 서너살된 자식에게 골프를 시키는 것을 볼 때 드는 생각 같은 것이다)